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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4대문

우리는 성곽순례를 서문(西門) 북쪽에서 출발하였는데,
문호가 돈의문(敦義門)인 서문은
별명으로 새문(塞門), 혹은 옮겨 새로 지었기에 신문(新門)이라고 한다.
(그래서 당주동에서 경희궁 지역까지를 신문로 또는 새문안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왕산(仁王山, 인왕은 절간의 입구에 있는 밀적과 나라연의 금강역사를 의미한다.
북한산의 문수봉, 보현봉, 그리고 대동문 밖의 석가봉을 상기해 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을 경유하여
경복궁의 뒷산인 한성의 주산(主山) 북악의 가파른 계단으로 된 길을 올랐다.
북악의 정상을 지나 청운대(靑雲臺)라는 광장이 나오는데 조금 지나 곡성(曲城)이 있다.


숙정문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가 바뀐 이름인데
그 변경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원래 삼봉이 지은 북문의 이름은 소지문(昭智門)이었는데
소지문-숙청문-숙정문으로 변동한 것이라 하겠다.
본시 삼봉이 문이름을 지을 때 동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문은 숭례문(崇禮門), 북문은 소지문(昭智門)이라 하였다는데
이는 유가의 근본 도덕율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따르려는
삼봉의 의지에 기인한 작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1413년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문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나?) 후에는
문을 폐쇄하고(이때 숙청문으로 이름이 바뀐 듯하다),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는데
그래서 성북동 인근 지역이 오늘날 상대적으로 궁벽진 모양새를 갖게 된 것이라 한다.
또 전해지기로는 북문인 숙청문은 음양오행설에서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곳인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아 또 한 가지
문을 열면 음풍(陰風)이 불어 장안의 부녀자들이 음란한 행위를 많이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수년전 다시 북문이 열린 것과
오늘날의 부녀자들의 방종이 늘어난 것이 어느 정도 상관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혜화문의 본시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다.
창경궁의 정문이 홍화문이었기에 이를 피해 이름을 혜화문이라 하였다 한다.
1754년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그린 동소문도(東小門圖)를 보면
문루(門樓)는 이미 없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제침략시기에 도로를 뚫고 전차길을 놓는 바람에 고개는 깎여 평평해졌고(애오개마냥)
문은 옆으로 이동되었다.
근자에 복원되어 혜화문에 문루가 올려지고 길도 확장되어 고갯길에 있던 추억의 석굴암 주점도 사라졌다.